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비니키우스(기원전 19년 집정관)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캅파니아 지방의 칼레스 시에서 [[에퀴테스]]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비니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. 그의 아버지는 '푸블리우스'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는 것 외엔 알려지지 않았다. 기원전 25년 [[율리우스 카이사르]]가 [[갈리아 전쟁]]을 통해 정복한 '갈리아 코마타' 속주의 총독을 맡던 그는 로마 상인들을 살해한 [[게르만족]]을 상대로 징벌 원정을 벌였다. 이후 모종의 시기에 아카이아 총독을 맡았고, [[코린토스]]에 [[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]]를 기리는 비문을 세웠다. 기원전 19년 9월 [[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]]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. 기원전 14/13년 일리리쿰 총독으로서 판노니아인들의 침략을 격파했다. 이후 아그리파에게 일리리쿰 주둔군의 지휘권을 넘긴 뒤 마케도니아 속주로 파견되어 그곳의 병력을 이끌고 도나우 강의 왼쪽 강둑을 건너 바스타르니족을 격파했다. 기원전 2년 [[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(기원전 16년 집정관)|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]]의 뒤를 이어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. 서기 1년, 게르만 부족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. 그는 이들을 상대로 3년 동안 격전을 벌여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, 반란을 결정적으로 진압하는 데는 실패했다.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4년 [[티베리우스]]를 게르마니아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고, 그는 로마로 귀환했다.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. [[수에토니우스]]에 따르면,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. >친애하는 티베리우스, 저녁 식사에는 우리도 같은 손님들이 있었고 비니키우스와 실리우스도 있었다. 어제와 오늘 식사 중에 우리는 노인들처럼 놀았다. 주사위를 던져 누구든지 "개"를 얻거나 주사위 당 데나리온을 6개 베팅하고 "비너스"를 얻은 사람이 돈을 가져갔다. 아들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는 서기 2년 집정관을 역임했고, 손자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는 3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